절정, 꽃, 광야, 청포도, 교목 - 이육사 -
절 정(絶頂)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 끊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꽃 - 이육사 -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내리잖는 그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꿈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북쪽 쓴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속 깊이 꽃 맹아리가 옴작거려
제비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約束)이여!
한 바다 복판 용솟음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성(成)에는
나비처럼 취(醉) 하는 회상(回想)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광 야 - 이육사 -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山脈)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 하였으리라
끊임 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季節)이 피여선 지고
큰 강(江)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梅花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청포 도 - 이육사 -
내고장 칠월(七月)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 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교 목 - 이육사 -
푸른 하늘에 닿을듯이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서셔
차라리 봄도 꽃피진 말어라.
낡은 거미집에 휘두르고
끊없는 꿈길에 혼자 설내이는
마음은 아예 뉘우침 아니라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
마침내 호수(湖水)속 깊이 거꾸러저
참아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
이육사
이원록 또는 이원삼(진성이씨)
필명: 이육사 시인 · 독립운동가, 아호 육사(陸史)는 대구형무소 수감번호
'이육사(二六四)'에서 취음한 것이다.
출생: 1904년 4월 4일 경상북도 안동 도산면
사망: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감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