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뜰, 물망초, 정 , 갈대 섰는 풍경 - 김춘수 -
꽃 - 김춘수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엘레지(이른봄 산에서 되바라지게 핀 엘레지를 보면 너무도 반갑다.)
뜰 - 김춘수 -
아침 햇살이
라일락꽃잎을 홍건히 적시고 있다.
한 아이가 나비를 쫓는다.
나비는 잡히지 않고
나비를 쫓는 그 아이의 손이
하늘의 저 투명한 깊이를 헤집고 있다.
그대의 눈은 나의 거울이다.
물망초 - 김춘수 -
부르면 대답할 듯한
손을 흔들면 내려올 듯도 한
그러면서도 아득히 먼
그대의 모습
하늘의 별일까요.
꽃피고 바람 잔 우리들의 그 날
날 잊지 마셔요.
그 음성 오늘 따라
더욱 가까이에 들리네
들리네...
정 - 김춘수 -
외로운 밤이면
자꾸만 별을 보았지.
더 외로운 밤이면
찬란한 유성이 되고 싶었지.
그토록 그리움에
곱게곱게 불타오르다간
그대 심장 가장 깊은 곳에
흐르는 별빛처럼
포옥 묻히고 싶었지.
갈대 섰는 風景
이 한밤에
푸른 달빛을 이고
어찌하여 저 들판에
저리도 울고 있는가
낮 동안 그렇게도 쏘대던 바람이
어찌하여
저 들판에 와서는
또 저렇게도 슬피우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바다보다 고요하던 저 들판이
어찌하여 이 한밤에
서러운 짐승처럼 울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