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각산 14성문
삼각산 14성문 종주
산행일: 2018년 2월 18일 일요일
소재지: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서울특별시 은평구, 강북구 일대
코스: 북한산성입구-대서문-선봉암-법용사-중성문-법용사-국녕사-가사당암문-용출봉-용혈봉-증취봉-
부왕동암문-나월봉-나한봉-715봉-청수동암문-문수봉-대남문-대성문-보국문-칼바위길-대동문-동장대(시단봉)
-용암문--백운봉암문(위문)-약수암-대동사-상운사-북문-원효봉-원효암-서암문-수문지-북한산성입구
대서문(大西門) ↓
대서문은 조선 시대 단위로 높이 11척, 넓이 13척이며 홍예문으로 만들었다. 북한산성 6개의 대문과 암문 1개 수문이 설치되었는데, 그 중 대동문(현 대성문) 다음으로 규모가 큰 문이 대서문이다. 대서문은 의상봉과 수문 사이에 위치해 있다.
중성문(中城門) ↓
홍예문으로 조선 시대 단위로 높이가 11척~13척 너비가 13척~14척으로, 1712년 숙종이 북한산성에 행차하여 '서문
가장자리가 가장 낮으니 중성을 쌓지 않을 수 없다`며 중성문을 쌓도록 명해 동년 5월 축조 공사 착수 1714년 중성문과 함께 완공 되었다. 중성에는 중성문과 옆에 시구문 수구(水口)가 하나씩 있다.
국녕사(國寕寺) ↓
국녕사는 북한산성의 축조, 수비, 관리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던 승병이 주둔한 승영사찰(僧營寺刹) 이었는데,
가사당암문의 수축과 방어를 담당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 까닭에 가사당암문은 국녕문(國寧門)으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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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당암문(袈裟堂暗門) ↓
의상봉과 용출봉 사이 고갯마루에 위치한 암문이다. 조선 숙종 37년(1711년)에 북한산성 성곽을 축조하면서 만든
8개의 암문(暗門) 중 하나로, 암문은 비상시에 병기나 식량을 반입하는 통로이자, 때로는 구원병의 출입로로 활용된
일종의 비상출입구이다. 산성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고갯마루나 능선에 설치했다. ↓
부왕동암문(扶王洞暗門) ↓
규모는 조선 시대 단위로 높이 9척, 너비 8척이다. 외부는 홍예 모양으로 만들었고, 내부에는 성의 바깥 쪽으로 문을
달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북한산성을 축성할 당시 남쪽은 대남문과 소남문, 암문을 하나씩 만들 계획이였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소남문(현 대남문)과 암문 2개(부왕동암문, 가사당암문)을 만들었다.
부왕동(扶王洞)은 증취봉 아래에서 발원하여 삼천사로 내려가는 계곡으로, 예전에 이곳 삼천사에서 가까운 신혈사에서 임금(고려 현종)을 구한 적이 있다고 하여 왕을 도운 계곡이란 뜻으로 부왕동(扶王洞)이라 명명했다.
청수동암문(淸水洞暗門) ↓
청수동암문은 북한산의 나월봉과 문수봉 사이의 고갯마루에 위치해 있다. 1711년 숙종 37 북산산성 성곽을 축조하면서 8개의 암문(暗門) 중 하나로, 탕춘대성과 비봉에서 성 안쪽으로 들어오는 길목을 통제하기 위해 설치했다.
대남문(大南門) ↓
초기의 이름은 소남문(小南門)이었다. 규모는 조선 시대 단위로 높이 11척, 너비 11척이다.
현재의 문루는 복원된 것이다.
대성문(大成門) ↓
대성문 초기의 이름은 대동문(大東門)이었다. 규모는 조선 시대 단위로 높이 13척, 너비 14척이다. 문루는 1990년대에 와서야 우진각 지붕 형태의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복원되었다. (대성문 현재 공사중 ~)
보국문(輔國門) ↓
대동문과 대성문 사이에 있으며, 초기의 이름은 동암문(東暗門)이었다. 규모는 조선 시대 단위로 높이 6척 6촌,
너비 6척 5촌이다.
문 안쪽에새겨진 명문을 보아 금위영에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한다.
북한산성 축조(1711년)후 동쪽에 있는 암문이란 뜻으로 동암문이라 불리었으나 그 아래 보국사를 창건한 이후 현재까지 보국문이라 불리게 되었다.
대동문(大東門) ↓
초기의 이름은 소동문(小東門)이었다. 규모는 조선 시대 단위로 높이 9척, 너비 10척이다. 현재의 문루는 1993년에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복원된 것이다.
내부에 있는 무사석에 새겨진 명문을 보아 금위영에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한다.
동장대(東將臺) ♣. 시단봉(586.0m) ↓
동장대는 북한산성 동쪽에 위치한 장대이며, 북한산성 3개의 장대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것이기도 하다.
조선 시대에는 금위영의 장수가 주둔했고, 1996년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중층 누각으로 복원하였다.
용암문(龍巖門) ↓
원래 이름은 용암암문(龍巖暗門) 이었다. 조선 시대 단위로 규모는 높이 6척 5푼, 너비 7척 5푼이다.
백운봉암문(白雲峰暗門) ↓
백운봉암문의 크기는 높이 1.7, 폭 1.9(높이 6척 3촌(寸)) 가량이다. 백운봉과 만경봉사이에 위치해 있다.
조선 시대 북한산성 축성 당시의 이름은 백운봉암문이었다. 그러나 일제가 들어서면서 이름을 위문으로 고쳣다.
지금은 일제 잔재를 없애려는 노력으로 이름을 백운봉암문으로 다시 고쳐 부르고 있다.
북문(北門) ↓
북문은 조선 시대 단위로 높이 11척, 너비 10척 규모이다. 홍예문으로 지어졌으나 지금은 문루는 없으며
초석만 남아 있다.
원효봉(元曉峰) ↓
삼각산의 한 봉우리로 북한산성 북문 위쪽에 있다.
서암문(西暗門)
서암문은 조선 시대 단위로 높이는 7척, 너비는 7척이다. 외부와 내부를 모두 홍예 모양으로 만들었으며, 성 안의
시체가 모두 여기를 통해 밖으로 나갔다 해서 시구문(屍軀門)이라고 불렀다.
수문(水門) ↓
수문은 대서문과 서암문 사이 계곡에 있는 북한산성의 문이다. 조선 시대 단위로 높이 16척, 너비 50척이다.
북한산성안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하여 북한산의 모든 물이 이곳으로 흘러나온다. 현재는 흔적을 찾기 어려우며,
계곡 옆 능선 위로 무너진 성벽이 남아있다. 다만 주변 바위에는 축성 당시로 추정되는 구멍들이 여러군데 남아 있다.
북한산성(北漢山城)
시대: 백제 ~ 조선
한양 도성 방어와 북진의 전초기지, 북한산성
성벽은 비교적 낮은 곳부터 해발 700m 이상의 봉우리 능선부까지 축조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산성 내에는 14개의
성문과 3개소의 장대 등의 시설물이 설치되었다. 또한 성내에는 상원봉 아래 130칸의 행궁과 140칸의 군대의 창고가
있었으며, 중흥사를 비롯한 12개의 사찰, 2개의 암자, 8개소의 일반 창고, 99개의 우물, 26개소의 저수지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현재 북한산성에는 삼국시대의 토성이 약간 남아 있기는 하나 대개 조선 숙종때 쌓은 것으로 여장은 허물어 졌고, 대서문과 장대지 · 우물터 · 건물터로 생각되는 방어시설 일부가 남아있다.
♣. 설 명절끝의 산행으로 ~
좋은 일기와 좋은 산우님들 함께 ~
눈도 입도 마음도 즐거운 하루였다.
더불어 보람도 있는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