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수도권산

삼각산 지도, 계곡, 사찰

봄나래 ~ 2013. 1. 17. 11:29

 

 

 

 

 

 

 

 

 

 

 

 

 

 

 

 

 

 

 

 

 

 

 

 

 

 

 

 

 

 


북한산국립공원은 세계적으로 드문 도심 속의 자연공원으로, 수려한 자연경관과 문화자원을 온전히 보전하고 쾌적한 탐방서비스 제공을 위하여 우리나라의 15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그 면적은 서울특별시와 경기도에 걸쳐 약 78.5㎢, 평수로 환산하면 약 2,373만평이고, 우이령을 중심으로 남쪽의 북한산 지역과 북쪽의 도봉산 지역으로 구분됩니다. 공원전체가 도시지역으로 둘러싸여 생태적으로는 "고립된 섬"이지만, 도시지역에 대한 "녹색허파"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으며, 수도권 이천만 주민들의 자연휴식처로 크게 애용되고 있습니다.
수도권 어디에서도 접근이 용이한 교통체계와 거대한 배후도시로 연평균 탐방객이 500만에 이르고 있어 "단위면적당 가장 많은 탐방객이 찾는 국립공원"으로 기네스북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이 같은 과도한 탐방압력이 북한산의 자연생태계를 점차 약화시키고 있어 자연휴식년제 구간, 산불조심기간 중 통제구간, 수많은 샛길, 안전사고 위험지역 등 출입금지구역에 대한 탐방객 스스로의 출입금지가 절대 필요합니다.

북한산국립공원은 거대한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주요 암봉 사이로 수십개의 맑고 깨끗한 계곡이 형성되어 산과 물의 아름다운 조화를 빚어내고 있으며, 그 속에 1,300여종의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습니다. 또한 삼국시대 이래 과거 2,000년의 역사가 담겨진 북한산성을 비롯한 수많은 역사,문화유적과 100여개의 사찰,암자가 곳곳에 산재되어 있어 다양한 볼거리와 생태,문화,역사 학습장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자연경관 : 단단한 우유빛 화강암이 장구한 세월을 걸친 풍화침식 작용을 통하여 형성된 대표적인 자연경관은 다음과 같습니다.

북한산
백운대(836.5), 인수봉(810.5), 만경대(799.5), 노적봉(716), 보현봉(714),
문수봉(727), 비봉(560), 형제봉(467), 원효봉(505), 의상봉(502)

북한산
거북바위, 사모바위, 형제바위, 코끼리바위, 용바위, 해골바위,
병풍바위, 쪽도리바위, 기도바위, 공기바위, 독바위, 소머리바위

북한산
우이계곡, 북한산성계곡, 효자리계곡, 진관사계곡,
구기계곡, 평창계곡, 정릉계곡, 삼천사계곡, 구천계곡

북한산
동령폭포, 구천폭포, 개연폭포

### 역 사
북한산은 국토의 중심부에 위치한 서울에 인접하여 우리나라의 2000년 역사와 그 궤를 같이하고 있다. 북한산의 최초 명칭은 부아악(負兒岳)이다. 부아악이란 명칭은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국망봉)의 어느 암봉 뒤에 애를 업은 형상의 바위가 붙어있다 해서 불렀다는 설(說)과 산봉이 뿔처럼 뾰족하게 생겨 불렀다는(부아→불→뿔) 설이 있다. 삼국시대에 부아악 또는 횡악(橫岳)으로 불렀던 북한산은 고려시대 성종(成宗)이후부터 1900년대까지 약 1천년동안 정상의 세 봉우리를 의미하는 삼각산(三角山), 또는 조선시대 중기까지 화산(華山), 화악(華嶽)으로 불리었다. 북한산이란 명칭은 1711년 조선중기의 숙종(肅宗)이 축조한 북한산성을 염두에 두고 남한산(성)과 대비하여 "한강 북쪽의 큰 산"이란 의미로 1900년대 초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 삼국사기에 의하면, 기원전 18년경에 고구려 동명성왕의 아들인 온조와 비류가 남쪽에 새나라(백제)를 건국코자 내려와 지금의 한강이북지역을 도읍으로 물색코자 북한산(부아악)에 올랐다고 하며, 백제의 개루왕이 서기 132년 산성을 쌓았다고 한다. 삼국시대에는 전략요충지인 북한산을 서로 차지하려는 국경싸움이 그치지 않아 서기 555년 신라 진흥왕이 북한산을 국경으로 삼는다는 순수비(巡狩碑)를 비봉에 세우고, 557년 한강 이북 지역에 행정구역인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설치하였다. 신라시대의 명승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북한산에 들어와 수도를 하여 원효봉과 의상봉이라는 지명을 남겼으며, 원효대사가 상운사와 삼천사를 창건하였다. 이어 승가사와 도선사가 창건되었다.
- 고려시대 태조 왕건이 중흥사를 창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고려 8대 현종(顯宗)이 북한산에서 승려생활을 할 때 진관(津寬)스님의 은공을 기려 그를 국사(國師)로 봉하고 1011년 진관사를 창건하였으며, 거란족이 침입하였을 때 북한산성 계곡 중흥동에서 피난생활을 하였다. 고려 예종 1109년 탄연(坦然)이 문수사를 세웠다. 고려말 우왕 1388년 최영장군은 중흥성(북한산성의 전신)을 축조하여 군대를 주둔시킨바 있으며, 원증국사(圓證國師) 보우가 중흥사를 중건하고 그 옆에 태고암을 지었다.
- 조선 건국 초에 무학대사가 한양을 조선의 도읍으로 삼기 위해 북한산을 답사하였으며, 수양대군(세조)이 천문관측을 위해 보현봉을 올랐고, 많은 신하와 선비, 승려들이 풍수지리, 학문정진, 수도(修道)를 위해 출입했다는 기록이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수도 한양이 점령당하고 왕이 멀리 피신하는 사태가 발생된 이후 북한산성 축조 필요성이 대두되었으며, 이에 대한 오랜 기간의 찬반양론 끝에 숙종(肅宗)이 1711년 전란시 피난처 및 방어지로 삼기 위해 단 6개월만에 7,620보(步), 약 8.5㎞에 이르는 오늘의 북한산성을 축조하였다. 이어 북한산성의 외성(外城)으로 1713년 탕춘대성을 축조하기 시작했으나 신하들의 반대의견이 많아 완성을 보지는 못하였다. 숙종 이후 북한산성에 대한 전략적 중요성이 약화되어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한 방치와 전란시의 화재, 자연재해 등으로 성곽을 비롯한 주요시설, 사찰들이 크게 훼손되었다.
- 일제시대 때에는 일본 헌병대가 주둔하여, 의병과 독립군이 북한산을 거점으로 삼을 것을 우려, 북한산성내 대부분의 시설과 사찰을 불태웠다고 하며, 1927년 백운대에 쇠난간을 설치하고 철심을 박아 민족정기를 훼손하려 했다. 철심은 1980년대 모두 철거되었다.


문화자원
가.보물
-태고사: 원증국사탑비(제611호),보우국사 사리탑(제749호)
-삼천사: 마애석가 여래입상(제657호)
-승가사: 마애석가 여래좌상(제215호)

나.사적지
- 북한산성 성곽 8348m,성문14개소(사적제162호)
- 진흥왕순수비지(사적제228호)
다.지방 유형문화재(7점)
-구기:탕춘대성(제33호)
-원도봉:혜거국사부도(제122호),천봉당 태홀탑(제66호),천봉선사탑비(제67호)
-북한산성:금위영이건기비(제87호),증흥사지(기념물136호),행궁지(기념물160호)
라. 사찰(37개소)
지역별: 사찰명
원도봉: 망월사, 회룡사, 쌍용사,대원사, 법화사, 덕천사,석천사, 홍법사, 원효사,천문사, 지장사, 호암사

송추: 원각사, 송암사, 도성암,석굴암

북한산성: 태고사, 원효사, 상운사,노적사, 국녕사, 덕암사,무량사, 선봉암, 묘법사,대동사, 용학사, 봉성암,중흥사,진관사, 삼천사, 백화사,용암사, 각황사

북한산성
북한산내 문화유산으로서 손꼽히는 사적162호인 북한산성은 성곽을 따라 등산로가 나있어 축성의 뜻을 읽을수 있으며 산성의 역사를 깊이 들여다 보면 백제 개루왕5년(132년)에 토성(土城)으로 처음 축성되어 조선조 임진왜란(1592년)과 내란(1636년)을 겪으면서 수도북방 산성의 필요성이 커져 숙종37년(1711년)에 현규모의 축성이 완성되었으며, 산성의 특징은 조선조 산성축성의 대표적인 양식이고, 급한 산세와 자연경관과의 조화에 있다. 또한 산성축성시 설치된 전투지휘소로 주변에 대한 조망이 양호하고, 현재 동장대가 복원 완료되어 탐방의 묘미를 느낄 수 있다.

도선사
우이동에서 산길을30분 가량 걸어 올라가면 삼각산의 큰 봉우리가 보이고 그 봉우리를 등지고 서 있는 고찰이 도선사이다.
대한불교 조계종에 속한 도선사는 1,100여년전 신라말엽의 도승이었던 도선국사에 의해서 창건되었는데, 불법과 천문지리의 심오한 이치를 통달한 도선국사가 명승 요지를 답사하다가 삼각산에 이르러 산세가 절묘하고 청수한 이곳에 사찰을 건립했다고 한다.
석불전에는 관세음보살상이 새겨진 큰 바위가 있는데 유래는 다음과 같다.
도선사를 창건한 도선국사가 1천년 후 불법말세에 이곳에서 불법이 재흥할 것이라 예견하고 사찰 옆에 있는 큰 바위를 신통력으로 쪼개 약 6m높이의 관세음보살상을 조각했다고 한다.
또한 송림의 절벽끝에 서 있는 도선사 대웅전 옆 뜰에는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희귀한 보리수 한 그루가 서있어 보는 이를 더욱 숙연하게 한다.

화계사
수유동쪽 삼각산 줄기에 자리잡고 있는 화계사는 조선 중종 17년(1522년)에 신월선사가 창건하였으며, 그 후 대원군의 시주로 중수되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소나무, 전나무, 느티나무에 둘러싸여 이곳을 찾는 이들의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어 준다.
화계사는 조선왕조때 국태민안을 빌던 왕가 사람들의 출입이 많아 '궁궐'이라고 불려질 정도였다.
또한 이곳 골짜기에 있는 오탁천약수로 대원군이 피부병을 고치기 위하여 이절에 머물렀기 때문에 대원군의 글씨를 비롯해서 그와의 인연이 많이 얽혀

승가사
비봉의 동쪽 1km지점에 자리한 신라의 고찰'승가사'는 수대스님이 당나라 서역의 승가대사를 숭앙한 나머지 이곳에 터를 잡아 굴 속에 대사의 석상을 새겨 모심으로써 붙여진 이름이다.
절 뒤편 석실옆 소당안에는 석불좌상이 있으며 고려 13대 선종과 15대 숙종이 다녀간 일도 있는 유서깊은 가람이다.

진관사
서대문밖 독립문에서 10km지점 삼각산 계곡에 자리한 진관사는 신라시대의 고찰이면서도 900여 년전인 고려 현종(1009~ 1031년)때에 중창됐으나 그 뒤 난리속에 불타고 또 중수를 거듭하다가 지금은 대웅전과 불사 두서너채 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대웅전 안에는 그 옛날 고려 현종의 목숨을 구해 준 본존불상이 봉안돼 이 가람의 성가를 높이고 있다.

망월사 (望月寺)
망월사는 신라 선덕여왕 8년(639)에 해호스님이 여왕의 명을 받아 창건한 것으로 신라의 서울 월성을 바라보면서 왕실의 융성을 빌었다 하여 망월사가 됬다고 한다. 이곳에는 예로부터 운수 납자의 대선사들이 많이 거쳐갔는데, 고려시대의 혜거, 영소대사와 조선시대의 천봉, 영월, 도암등 많은 명승들이 배출됬으며, 근대의 도인이라 불리우는 만공, 한암, 성월등 선지식들이 지내던 곳이다. 망월사 큰 법당에서 남서쪽으로 언덕을 넘어가면 혜거국사부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122호)가 있다.

 
태고사 (太古寺)
태고사는 구암봉 아래 중흥사 뒷편에 위치한 사찰로 고려말인 14c 후반 명승 보우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처음에는 태고암으로서 중흥사 소속이었다. 구암봉 기슭의 긴 계단을 오르면 2단의 석축이 나오고 그 위에 서향의 대웅전과 원증국사부도탑비(보물 611호)를 모신 비각이 있다. 비각의 왼쪽으로는 돌로 지은 산신각이 있다. 산신각 뒷편에는 노적, 만경, 백운봉과 어우러져 멋진 모습을 가진 부도탑 3기가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