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 창 38

백령도 - 함기석 -

백 령 도               - 함기석 -   해안 철책에 버려진 군화 속에서 달이 흘러나온다.   군화 속엔 한 쌍의 물새  몽금포에서 날아와 목포항에서 날아와  신혼부부가 된 빨간 꽁지 물새   상처 난 부리로 상처 난 가슴을 쓸어 주다  알을 품고 곤히 잠들어 있다  날개에 날개를 포갠 채  서로의 아픈 꿈 꾸어 주고 있다.   군화 속에서 은하수 흘러나와 밤하늘로 퍼진다.

시가있는 창 2024.03.04

청노루, 나그네, 4월의 오래, 윤사월, 산도화 - 박목원 -

청노루 - 박목월 -                                    머언 산 청운사(靑雲寺)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紫霞山)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나는 열 두 굽이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

시가있는 창 2024.02.21

그때는 알지못했습니다 - 타고르 -

그때는 알지못했습니다.                                               -타고르-                    연꽃 피던 날                   마음은 헤매고 있었지만,                   나는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내 바구니는 비어 있는데,                   그 꽃을 찾아보지도 않았습니다.                    때때로 슬픔이 나를 찾아왔고                   나는 꿈에서 깨어나                   남녘 바람에서 불어오는 한 줄기                   감미로운 향기를 맡았습니다.                    그 아련한 감미로움은     ..

시가있는 창 2023.06.25

흔들리며 피는 꽃, 홍매화, 단풍드는 날, 바람이 오면 - 도종환 -

흔들리며 피는 꽃  - 도종환 -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이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아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엇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홍매화  - 도종환 -          눈 내리고 내려 쌓여 소백산자락 덮어도         매화 한송이 그 속에서 핀다.          나뭇가지 얼고 또 얼어   ..

시가있는 창 2023.03.17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너에게 띄우는 글, 나무의 자장가, 3월에 - 이해인

오을은 내가 반달로 떠도  - 이해인 -               손 시린 나목(裸木)의 가지 끝에              홀로 앉은 바람 같은              목숨의 빛깔               그대의 빈 하늘 위에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차 오르는 빛               구름에 숨어서도              웃음 잃지 않는              누이처럼 부드러운 달빛이 된다               잎새 하나 남지 않는              나의 뜨락엔 바람이 차고              마음엔 불이 붙는 겨울날                  빛이 있어              혼자서도              퐁요로와라         ..

시가있는 창 2023.03.17

수선화 에게, 가난한 사람에게, 낙화 - 정호승 -

수선화 에게 - 정호승 -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오면 빗 길을 걸어갈       갈대 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가난한 사람에게 - 정호승 -         내 오늘도 그대를 위해       창밖에 등불 하나 내어 걸었습니다.       내 오늘도 그..

시가있는 창 2022.06.14

새벽 편지, 기다림, 바람이 좋은 저녁 - 곽재구 -

새벽 편지 - 곽재구 -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고통과 쓰라림과 목마름의 정령들은 잠들고 눈시울이 붉으진 인간의 혼들만 깜박이는 아무도 모르는 고요한 그 시각에 아름다움은 새벽의 창을 열고 우리들 가슴의 깊숙한 뜨거움과 만난다 다시 고통하는 법을 익히기 시작해야겠다 이제 밝아올 아침의 자유로운 새소리를 듣기 위하여 따스한 햇살과 바람의 라일락 꽃향기를 맡기 위하여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를 사랑한다는 한마디 새벽 편지를 쓰기 위하여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희망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응 것만 같다. 기다림 - 곽재구 - 이른 새벽 강으로 나가는 내 발걸음에는 아직도 ..

시가있는 창 2022.06.03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에게 가는 길, 봄날은 간다 - 안도현 -

그대에게 가고 싶다 - 안도현 해 뜨는 아침에는 나도 맑은 사람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밤새 퍼부어대던 눈발이 그치고 오늘은 하늘도 맨 처음인 듯 열리는 날 나도 금방 헹구어낸 햇살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창가에 오랜만에 볕이 들거든 긴 밤 어둠 속에서 캄캄하게 띄워 보낸 내 그리움으로 여겨다오 사랑에 빠진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그리움 하나로 무장무장 가슴이 타는 사람 아니냐 진정 내가 그대를 생각하는 만큼 새날이 밝아오고 진정 내가 그대 가까이 다가다는 만큼 이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면 그리하여 마침내 그대와 내가 하나되어 우리라고 이름 부를 수 있는 그 날이 온다면 봄이 올 때까지는 저 들에 쌓인 눈이 우리를 덮어줄 따뜻한 이불이라는 것도 나는 잊지 ..

시가있는 창 2022.06.03

님의 침묵, 복종, 사랑, 고적한밤, 나의 꿈

님의 침묵 - 한용운(韓龍雲) -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 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는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

시가있는 창 2021.06.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