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유래

삼별초 이후 제주도

봄나래 ~ 2016. 2. 4. 14:37

삼별초의 대몽항쟁


몽골과의 강화협정에 삼별초는 반항하고 몽골과 끝까지 항쟁할 뜻을 보였다(그들은 최씨 무인정권의 별동대로, 몽골과의 강화는 곧 무신정권의 몰락이고 고려 왕정복고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어서의 이유도 있었다.)

왕권을 되찾은 원종은 원종 11년(1270) 삼별초를 해산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배중손(裵仲孫) 대장이 이끄는 삼별초는 이에 반기를 들고 강화도에서 왕족 온(溫)울 왕으로 내세우고 봉기했다. 그래서 삼별초의 난 이라고 하는 것이다.

   진압군이 강화도로 쳐들어가자 삼별초는 1천여 함선을 징발하여 고려정부의 재화와 백성을 싣고 진도로 가서 용장산성을 쌓으며 저항했다. 그러나 1271년 음력 5월 김방경과 흔도(炘都)가 지휘하는 여몽연합군이 공격하여 용장산성은 함락되고 배중손은 전사했다. 이때 김통정(金通精)이 이끄는 잔존 삼별초가 탐라로 건너와 거점을 잡은 곳이 바로

항파두리이다.



삼별초 이후 제주도


원종 14년(1273)에 제주의 삼별초군을 토벌한 직후 원나라는 탐라국초토사(耽羅國招討司)를 설치했고 곧바로 '탐라국 군민 도다루가치 총관부(耽羅國 軍民 都達魯花赤 摠管府)` 라고 명칭을 바꾸고 다루가치를 파견하여 직점 관할했다.

   다루가치(達魯花赤〈달로화적〉, darughachi)는 점령지 통치관이라는 의미다. 관인(官印)을 갖는 군대의 사령관으로 관할행정 전반의 결정권을 가졌고 원칙적으로 몽골인만이 임명되었다.

   즉. 육지부의 고려와 달리 탐라는 원나라가 직접 관할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탐라를 목마장(牧馬場)으로 이용하러 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때부터 탐라는 원나라 14개의 국영목장 중 하나가 되어 3만 필의 말을 사육했다. 이렇게 제주도는 근 100년간 몽골에 예속된 채 식민지 지배를 받는 쓰라린 역사를 격었다.

   원나라 말기 공민왕은 반원정책을 펴 쌍성총관부를 회복하면서 영토회복을 꾀했다. 이때 탐라군민총관부에도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말을 키우던 몽골인인 목호(牧胡)들의 저항에 부딪혔다. 고려 조정에서 파견한 순무사(巡撫使)가 목호들에게 살해될 정도였다. 1366년에 100척의 군선을 파견했지만 이 역시 목호에게 밀려 퇴각했다.

   게다가 이후 명나라가 원나라를 멸망시키면서 원나라 땅은 명나라에 귀속하는 것이 마땅하다며 영유권 주장을 하고 나섰고, 원나라 황족들의 귀양지로 제주도를 생각하고 있었다. 목호들은 그네들 편이었다.

   이에 공민왕 23년(1374) 최영 장군은 대대적으로 제주도를 토벌하여 목호들의 반란은 진압되었다. 목호들이 마지막으로 퇴각한 곳이 서귀포 외돌개 건너편 범섬이었다.  최영 장군은 법환포구와 범섬 사이에 배다리(선교〈船橋〉)를 놓아 목호들을 섬멸했다. 이리하여 탐라는 다시 고려왕조의 제주목으로 환원되었다.

   그리고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 태조 2년(1393) 12월에 제주목사 여의손(呂義孫)이 부임하면서 탐라는 육지의 여느 지방행정기구와 똑같이 중앙에서 관리가 파견되는 목사 고을이 되었다. 이때부터 사실상 제주는 한반도의 일원으로 확실하게 편입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일제 35년 식민지 지배를 받은 것을 치욕으로 생각하는데 제주인들은 거기에 100년을 더한 135년을 식민지 백성으로 살아간 아픔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 유흥준 지음에서..


♧ 삼별초


삼별초는 최우집권기에 탄생하여, 특히 대몽항전기에 큰 활약을 했다.

삼별초의 성격에 대해서는 사병(私兵)으로 이해하는 견해와 공병(公兵)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 사병으로 보는 견해는, 그것을 설치한 사람이 최우였다는 것과 『고려사』「병지」에 나오는 “권신들이 정권을 잡으면 삼별초를 자기들을 보호하는 핵심부대로 삼아 그들에게 녹봉을 후하게 주고, 또 간혹 사적인 은혜를 베풀며, 또 죄인의 재물을 빼앗아 그들에게 줌으로써 권신들이 그들을 마음대로 부리게 되어, 김준은 최의(崔竩)를 죽이고, 임연은 김준을 죽였으며, 송송례는 임유무(林惟茂)를 죽였으니, 이는 모두 삼별초의 힘에 의한 것이다.”라는 기사에 의거한다. 이에 반해 삼별초는 국가 재정으로 양성되고 국고에서 녹봉을 지출했다는 사실과, 삼별초가 당시 무인집권자의 사병이었던 도방이나 마별초 등과 엄격히 구분되었다는 사실에 의거하여 삼별초를 공병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 삼별초가 정부군으로서 독립하지 못하고 권신의 수족이 되어 그 정치권력과 깊이 유착되었던 것은 사실이나 이는 집권자가 국가의 공병을 사병처럼 이용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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